[작가노트]
1.
매일 걸었다. 사물을 보았고 풍경을 만났다. 내가 보고 만난 것들은 거기 있었고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나는 그들을 들었고, 그들과 더불어 침묵으로 대화했다. 그들은 내 밖에 있었고, 나는 그들과 만나기 위해 매일 자신이라는 문 밖으로 나갔다. 세계는 나를 나로부터 끄집어내 주었다. 날마다 나는 나의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만남으로써 거듭 구원 될 수 있었다.
2.
내가 본 것은 꽃이 아니고 그릇이 아니다. 내가 만난 것은 나무가 아니고 구름이 아니다. 그들을 보기 전에 이미 나의 어떤 마음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나의 어떤 심상이 있었다. 나의 밖에서 나를 부르던 외물外物들은 그들보다 먼저 있던 내 마음을 비춰 주는 거울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고 그들을 그렸을 때 거기에는 그들이 아니라 내 마음이 있었다. 그림 안에는 움직이고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불완전하고도 찬란한 사람의 마음.
3.
내가 보이는 형상을 그렸을 때, 나는 그 형상에 기대어 보이지 않는 마음을 그린 것이다. 내가 세계와 만나는 지금 순간들은 곧 과거가 된다. 오늘 또는 어제, 혹은 그보다 더 먼 지난날의 이미지를 그린다는 것은 단지 과거를 모사하면서 현재를 낭비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의 내적 고유함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빌어 매 순간 새롭게 오고 있는 나의 현재를 그 이미지 안에 담는다. 나에게 그리는 행위는 언제나 현재이며, 현재에 존재하고 현재를 음미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이다.
4.
내가 그린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기에 앞서 인간의 마음이기에 내가 그린 그림 속에는 당신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사는 세계에 당신도 살고 있기에 내가 만난 세계의 이미지가 당신에게도 말을 걸 것이다. 내가 그린 그림들은 은유다. 그 은유들은 나로부터 나왔지만 나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과 삶, 고통과 치유, 어둠과 빛,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니까. 내 그림 앞에 서 있는 그대여, 불완전하고도 찬란한 사람이여. 그대도 나처럼 고통 받았고 때때로 외로웠다. 그대가 누구든지,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나의 은유 속에서 그대만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길 바란다. 당신의 삶을, 당신의 위안을, 당신의 재회를, 당신의 빛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그대의 희망은 그대 몫이다.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당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